"캔사스시티" 흑인 빅밴드의 거목 "카운트 베이시"

재즈 세계에서 스윙 재즈와 빅 밴드 재즈를 알지 못하면 재즈의 역사와 참된 재즈의 의미를

모르는 것과 같다. 환언하면 빅 밴드 재즈가 있었기 때문에 반작용에 의한 비밥의 탄생이 있었고,

결국 이러한 빅 밴드 출신이 재즈 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최영수 / 재즈 평론가 

  빅 밴드 재즈를 대별하면 백인과 흑인으로 이루어진 밴드로 나눌 수 있다.

다음 기회에 백인 빅 밴드를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회에는 흑인 빅 밴드 중에서 카운트 베이시를 논하고자 한다.

물론 카운트 베이시를 논하기 전에 플레쳐 헨더슨이나 듀크 엘링턴 악단도 있지만,

엘링턴의 세계는 차기에 연재하기로 하고 이즈음에 카운트 베이시를 알아본다. 

  캔사스 시티 재즈와 카운트 베이시 악단

   카운트 베이시 악단을 논하려면 먼저 캔사스 시티 재즈를 알아야 한다.

카운트 베이시가 처음으로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뉴욕과 세계를 향하여 자기의 존재를 알렸던 곳이

바로 캔사스 시티다. 30년대 카운트 베이시를 필두로 중서부의 지방 도시 캔사스 시티의

밴드들이 재즈의 역사를 다시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재즈계에 새로운 힘을 실었던

그 사운드에는 분명히 어떤 비밀스런 무엇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멕시코만에 인접한 항구 도시 뉴 올리언즈에서 20세기초에 태어난 재즈는 1910년대말

에는 중심지를 시카고로 이동하여, 30년대에 이르면 뉴욕이 재즈의 본고장이 되어 버린다.

캔사스 시티는 이러한 재즈의 변천에서 생겨난 도시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만들어진

사운드는 스윙 재즈의 붐이 일고 있던 30년대 재즈의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다.

  캔사스 시티 주위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곡창 지대로서, 이 도시는 밀 등의 제분업과

가축의 정육, 그리고 그들 생산물의 거래가 성행하던 상업 도시로서 번창하였다. 그뿐이

아니고 ‘밤의 거리’로서도 지방 도시로서는 생각 이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 배경

에는 캔사스 시티만의 독특한 사회적 상황이 존재하고 있는데, 바로 이 도시는 부패

정치와 범죄가 지배하는 무법 천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이었다. 20년대 캔사스

시티는 톰 펜터거스트라는 정치계 거물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이 지역 일대의

건설업계를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갱스터를 이끌고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알콜류의

판매로 거액의 이익을 챙긴다. 20년대에 시작된 금주법 시대에도 이 도시에서는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하는 점과 더불어 부정 부패와 범죄, 도박이 횡행하였던 것이다.

  캔사스 시티는 전국 유수의 환락 도시로서 인구 50만의 도시이지만 전성기에는 카바레와

나이트 클럽의 수가 100개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바, 댄스 홀, 극장이

즐비했다. 이런 유흥가가 번창하다 보니 주변 지역으로부터 많은 고객들이

운집하여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다.

  1929년의 대공황이 시작되어 불황이 계속된 미국 내에서도 이 도시만은 오히려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불황으로 미국 내의 나이트 클럽과 댄스 홀이 점차적으로 폐쇄되어 빅 밴드들은 해산이 불가피했다.

실직한 재즈 뮤지션들이 캔사스 시티로 몰려들었다. 도무지 불황이란 이 도시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캔사스 시티의 밴드 리더는 우수한 뮤지션을 마음대로 멤버로 영입하였다.

 

  스윙 재즈보다도 더욱 강한 스윙감 넘치는 비트, 점프

 

  20년대 캔사스 시티에서 인기가 높던 밴드는 베니 모텐 악단, 조지 리 악단, 윌터 페이지가

이끄는 블루 데블즈와 알폰소 트렌트 악단 등이 있었다. 블루 데블즈에는 핫 리프스 페이지

(TP), 버스터 스미스(AS), 지미 러싱(VO), 그리고 카운트 베이시(P) 등의 멤버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베니 모텐 악단에 흡수되어 30년대에는 이 밴드가 최고의 악단으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모텐 악단은 뮤지션들 사이에서 듀크 엘링턴 악단과 플레쳐 헨더슨 악단 등 뉴욕의

일류 악단과 비견될 정도였다. 35년에 모텐이 급사하여 악단이 분열되었다. 그중에서 하나

를 이끌게 된 이가 카운트 베이시로서 이후의 캔사스 시티 재즈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이 리드하는

시대가 되었다. 베이시를 이어 앤디 커크 앤드 클라우즈 오브 조이, 할런 레너드 (AS.TS),

앤드히스 로켓츠, 제이 맥샌(P) 악단 등이 인기를 누렸다. 이 제이 맥샌 악단에 불멸의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가 활약하고 있었다.

  캔사스 시티 재즈의 특징은 리프(Riff)를 앙상블에 의해서 전면으로 이끌어 내는 연주에 있었다.

어레인지는 악보로 하지 않고, 헤드 어레인지(구두로 전달하는 방법)로 하면서, 그 심플한

어레인지 속에 각 솔로 주자가 애드립을 반복한다. 리프와 어우러져 캔사스 시티 재즈를

약동감 넘치게 하는 것이 리듬이었다. 당시 전국에 붐을 일으키고 있던 베니 굿맨 등의

스윙 재즈보다도 더욱 강한 스윙감 넘치는 비트 감각은 ‘점프’라고 불리었다. 40년대 후반에

수없이 나타나 강렬한 비트를 내세운 연주로 인기를 넓힌 점프 밴드는, 캔사스 시티 재즈의

원류가 된다. 캔사스 시티 인구의 약 15퍼센트를 점한 흑인으로서는 옛부터 블루스의 확고한

전통이 있고, 이러한 풍토에서 태어난 캔사스 시티 재즈는, 역시 흑인적인 감각을 농후하게

유지하며, 리프의 다용과 강렬한 스윙감은 그러한 상황의 표출이었다.

  38년 펜터거스트가 탈세로 고발되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로써 캔사스 시티의 환락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개혁파가 복권되어, 나이트 클럽이나

댄스 홀이 폐쇄되고, 많은 뮤지션은 뉴욕으로 대이동하였다. 워낙 실력들이 좋은지라 뉴욕

재즈에 커다란 활력을 주었다. 인기를 얻고 있던 스윙 재즈가 백인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던

시기에 대조적으로 약동하는 리듬과 우수한 애드립 능력을 가지고 있던 캔사스 시티 출신의

뮤지션이 재즈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곧 그들은 흑인 재즈의 중심 세력이 된 것이다.

  캔사스 시티에서 진출한 뮤지션은 얘기하기가 벅차지만, 그중에서 이후의 재즈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두 사람이 있다. 우선 레스터 영(TS)으로 종래의 테너 색소폰에서 모범이 된 콜멘

호킨스의 스타일을 타파한, 그만의 특유의 부드러운 톤과 매끄러운 프레이즈는 당시로서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후의 비밥의 서장이기도 했는데, 빌리 할리데이(VO)와의

공연은 재즈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되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찰리 파커(AS)는

제이 맥샌 악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가 뉴욕으로 입성하여 비밥 혁명의 선두에 섰다.

비밥은 캔사스 시티 재즈가 내포하고 있는 블루스의 전통을 정면으로 승계하여 승화시킴으로써

참된 재즈의 혁명이 되었고, 비밥과 더불어 점프 밴드의 융성이 리듬 앤 블루스를 탄생시키고,

미국 음악의 근저를 흔들어 놓았다. 이런 점을 미루어 캔사스 시티 재즈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이다.

  데카의 황금알이었던베이시 초기의 주옥 같은 명반들카운트 베이시는 1904년 8월 21일

뉴 저지주 레드 뱅츠에서 태어나, 84년 4월 26일 플로리다주 헐리우드시의 한 병원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베이시는 지방의 소년 밴드에서

드럼을 쳤으나, 소니 글리어 소년의 드럼 연주를 듣고 의기 소침하여 의욕을 상실하였다.

이때 피아노로 전향하여 할러웨이 부인이라는 선생을 정식으로 사사하고, 할렘으로 가서는

팻츠 윌라에게도 교습을 받았다. 투어링 가수들의 반주와 준 클라크, 엘마 스노우든의

밴드에도 잠깐 머물었으며, 2년간 곤잘레스 화이트 쇼의 반주자로서 일하였다. 이 그룹이

27년 캔사스 시티에서 해산한 후, 무성 영화관에서 호구지책을 해결하는 한편, 연주에

몰입하고 있던 블루 데블즈의 리더 월터 페이지에게 연락하여 곧바로 이 그룹의 피아니스트로 영입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27년경은 금주법이 절정기에 있었으며, 캔사스 시티는 치외법권적인

환락의 도시였다. 29년에 베이시는 캔사스 시티 제일의 밴드 베니 모텐 악단의 세컨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35년, 모텐이 급사하자 베이시는 캔사스 시티의 ‘소노 클럽’의 밴드에

구 멤버들을 영입하여 리더가 되었다. 이 클럽에서의 방송(베이시가 카운트라는 칭호를 이때 얻었다)

을 들은 명 프로듀서 존 해먼드에 의해서 이 밴드는 출세의 가도를 걷게 된다. 해먼드가

너무나 빨리 베이시를 알아 버리자, 데카 레코드에서는 사장이 직접 캔사스 시티로 베이시를 찾아와

750달러에 24곡에 달하는 녹음을 인세도 없이 옵션으로 걸고 그의 사인을 받아 버렸다.

이에 격분한 존 해먼드는 유니언에 제소하여 녹음 대가를 유니언 수준으로 인상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인세 요구는 좌절되고 말았다. 베이시 초기의 주옥 같은

명반은 이렇게 해서 데카의 황금알이 되었던 것이다.

 

  아내의 죽음 맞이한 뒤 1년여 만에 세상 떠나

 

  밴드는 환락의 등이 꺼진 캔사스 시티를 뒤로 하고 시카고, 버팔로를 거쳐 뉴욕에 입성한다.

이때 시카고에서 해먼드의 감수로 네 곡을 픽 업 멤버로 컬럼비아-보칼리언에 레코딩하였으나,

데카와의 관계로 베이시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고, 존즈∼스미스 inc.로 했다. 36년에는

드디어 뉴욕의 ‘로즈랜드 볼룸’에 데뷔한다. 그러나 캔사스 시티 시절의 블루스와 오리지널

리프 곡만으로 뉴욕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유행가, 영화 주제가에서

탱고, 룸바까지 연주를 하게 했다.

  캔사스 시대부터 플레쳐 헨더슨이 그러한 곡들을 보내와서, 뉴욕에서도 돈 레드맨, 지미 맨디,

버스터 하딩, 앤디 깁슨 등이 편곡을 해주었으나, 데카에서 레코딩했던 당시의 녹음을 들으면,

신곡과 기성곡 레퍼터리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절감하게 되었다. 38년 1월 ‘사보이 볼룸’에

출연하여 절대적인 호평을 받고, 38년 7월부터 반년간은 ‘페이머스 도어’에 출연하고, 이어

반년을 시카고를 거친 후, 39년 이후는 웨스트 코스트를 출발점으로 전국을 순회 공연하였다.

  뉴욕에서는 전혀 무명의 뮤지션이었던 빅 클레이턴, 해리 ‘스위츠’ 에디슨(TP), 딕키 웰즈,

베니 모턴(TB), 얼 위렌(AS), 레스터 영, 하샬 에번스(TS), 프레디 그린(G), 조 존즈(DS),

헬렌 흄즈, 지미 레싱(VO) 등 멤버는 제각기 자기 분야에서 놀라운 인기를 누렸으며,

명실 공히 초일류의 반열에 올랐다. 베이시는 새로운 것에도 호기심의 눈을 번뜩였다.

비밥에 흥미를 보인 그는 45년 5월부터 1년 가까이 J.J.존슨, 일리노이 랴케를

멤버로 영입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49년부터 50년에 걸쳐서 오케스트라의 존속이 어렵게 되어 일단 해산하고 캄보를 만들었다.

51년에 다시 뉴 베이시 악단을 결성하기까지 버디 데프랑코(CL)도 활약했었다. 뉴 베이시에는

마샬 로얄(AS)을 부 리더로 하여, 악보에도 애드립에도 강한 신예가 모여들어 올드 밴드보다도

커다란 명성과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었다. 올드 밴드가 솔로를 중심으로 한 리프 앙상블로

구성되어 있던 것에 반해, 뉴 밴드는 브래스와 리드 섹션을 보강하여 앙상블을 두텁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새로운 세대의 편곡가 닐 헤프티, 프랭크 포스트, 어니 윌킨스 등을 기용하는

한편 조 윌리엄스라는 대형 가수를 손에 넣었

 

다. 60년 윌리엄스가 독립하여 가버린 뒤 공백을 메꾸는 데는

실패했다. 해외 연주 여행과 라스베거스의 출연이 이 밴드의

연중 행사가 되었다. 마샬 로얄이 떠난 뒤에는 에디 ‘락죠‘

데이비스가 이어 나갔다.

  60년대에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레코딩과 스테이지에 참

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토니 베넷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엘라 핏제랄드, 빙 크로스비, 밀즈 브라더스, 앨런 크플랜

드 싱어즈 등을 레코딩하였다. 이로써 재즈 전문 빅 밴드가

살아남기 위한 경제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몇 비평가들은 ‘베이시가 무차별하게 파풀러 뮤직을 취

급하여 고령층의 청중을 겨냥하므로 크리에이티브한

시기는 끝났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라고 비난

했다. 그렇다고 해도 재즈사에 미친 그의 족적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랑하는 아내가

83년 4월 11일에 죽은 뒤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

고 일년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Foever Count!

 

http://www.audiophiles.co.kr/jazz200007.htm